2018년 10월 14일 일요일

최상천의 사람나라 시즌1 43강 주권전쟁 8년① : 부마항쟁-혁명적 민주주의 축제

최상천의 사람나라 43강 주권전쟁 8년① : 부마항쟁-혁명적 민주주의 축제


최상천의 사람나라 43강

 주권전쟁 8년① : 부마항쟁-혁명적 민주주의 축제

 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

 - 부산대학교 제2도서관 10.16 기념비


 1. 79 부마항쟁은 무시해도 되는 ‘작은 일’인가?

 1) 부마항쟁만 제외
 (1) 삼일절, 광복절은 국경일 : 기미혁명/삼일절은 한국사 최고의 사건
 (2) 3.15 의거, 4월 혁명, 5.18 광주항쟁, 6월 민주항쟁은 법정기념일
 ① 4월 혁명은 당연히 국경일
 ② 부마항쟁은?

 2) 사실은
 (1) 4월 혁명, 6∙3항쟁 이후 최초의 시민민주항쟁
 (2) 분단조폭체제 원흉 박정희 제거, 유신체제 붕괴 초래

 3) 그런데 왜 국가기념일에서도 빠졌나?
 (1) 김영삼 정권,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은 뭐했나?
 ① 3당 합당(90) 이후 부산의 ‘친독재 반민주’ 정서에 순응 : 광주항쟁과 대비
 ② 부산운동권도 운동권 아닌 시민항쟁에 대한 무관심
 ③ 시민항쟁 : 항쟁세력→기념 추진세력 안 됨 *민주화운동권 김재규 무시 *이런 일은 나도 많이 겪음

 (2)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2013.3.7)
 ① 진상규명도 막는 법
 ② 재평가, 국가기념일 지정도 불가

 (3) 제대로 된 평가와 새로운 특별법 필요

 2. 유신체제와 부산

 1) 유신 : 오카모토 천황체제

 (1) 천황 국가 : 조폭국가

 ① 두목 주권 : 초헌법 비상대권
 ② 두목의 나라 : 초국가 중앙정보부가 고문-정치공작본부, 콘트롤 타워

 (2) 관제 언론

 (3) 가미가제 ‘국민’ 총동원체제

 ① 군사조직-물샐틈없는 안보체제
 ② 주권자→박정희 꼬봉=국민

 (4) 태극교의 나라

 ① 박정희=교주=신
 ② 국민=태극교 신도 : 국민의례, 하기식→태극로봇=가미가제

 2) 주권자 폭발의 조짐 : 10대 국회의원 선거(1978.12.12)

 (1) 신민당의 선거 투쟁

 ① 유신헌법 개정, 긴급조치 9호 해제
 ② 재벌 집중 공격 신민당은 선거구호인 “신민 위에 서민 있고 공화 위에 재벌 있다”의 내용이 선거법상 특정 정당 비방조항에 해당된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사용금지 통보가 있었음에도 이를 무 시하면서 재벌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 선거 이슈로 잡았다.

 (2) 부정∙탈법 선거에도 불구 득표율 신민당 1.1% 승리 ; 32.8%-31.7%

 (3) 전 지역구에서 선전

 ① 지역구 154명 중 <68(공화당) vs 61(신민당)+3(민주통일당), 무소속 22>
 ② 서울(11-9), 부산(5-4), 광주(2-0) 등 대도시 압승(득표율 격차 대부분 10% 이상)

 (4) 민심 뒤집기 국회

 ① 공화당 : 31.7% 득표에 의석은 2/3 (66.7%, 68+77(유정회)=145/231)
 ② 신민당 : 32.8% 득표에 의석은 1/4 (26.4%, 61/231)

 3) 양김 협력, 김영삼의 단호한 투쟁

 (1) 김대중과 김영삼

 ① 김대중 : 사상가, 탁월한 전력가, 민주혁명파의 리더
 ② 김영삼 : 소박한 정의감, 최강 전투력, 민주개혁파의 리더

 (2) 5.30 전당대회, 양김 협력

 ① 김재규 지원-김대중 연금 일시 풀어줌
 ② 김대중 김영삼 적극 지원-김영삼 총재 당선

 이 무렵 재야의 김대중이 총재경선에 나선 조윤형·김재광·박영록을 불러 경선을 포기하고 김영삼 지지를 설득했다. 이렇게 하여 주류·비주류 간의 팽팽한 대결이 예상되는 가운데 전당대회의 날이 밝아왔다.

 (중 략)

 양대세력은 각기 29일 전야제를 열어 자파 대의원들의 결속을 다짐했다. 그런데 연금 중인 김대중이 돌연 김영삼 세력의 단합대회장인 을지로 아서원에 나타나 “이번 전당 대회는 당내의 친유신파와 반유신파의 대결”이라며 김영삼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김영삼 바람이 일게 되었다.

 (3) 김영삼의 투쟁선언 김영삼은 이날 당선 인사말에서 “오늘은 진실로 위대한 민권승리의 날이며, 아무리 험한 길을 가더라도 민주회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울 것을 맹세한다”면서 “나의 당수도 전은 이 정권에 굴복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며, 오늘의 결과는 우리가 곧 여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써 정권인수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삼은 이어 “국민성원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오늘의 승리를 있게 해준 윤보선·김대중 씨를 비롯해 김재광·박영록·조윤형·이기택 씨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4) 김영삼의 결사적 투쟁

 ① YH무역 노동자농성 사건 1979년 8월 9일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 마포구 신민당 당 사에 찾아와 농성에 돌입했으며 이들을 만났다.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 진입 하자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 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 이후 YH무역 여공과 노동자 시위를 주관하던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신민당사 와 신민당 지구당으로 숨어들었고, 경찰서와 검찰은 신민당사와 지구당 주변을 수색, 감시 하게 된다. 김영삼은 3일 간 이어진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였다. 8월 9일부터 8월 10일까지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치며 경고를 하였다. 8월 11일 새 벽,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순구 서울시 경무국장이 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 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 려붙였다. 곧이어 2000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투입되고 신민당 의원, 당직자 등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23분 만에 진압작전은 완료돼 YH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연행 되었다. 경찰의 연행과정에서 건물옥상에 올라간 YH무역 노동자들 중 여공 김경숙(당시 21세)이 시위 도중 신민당사 4층에서 추락하여 사망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경찰에 의 해 상도동 집으로 강제로 끌려나갔다. YH무역 여공 김경숙(당시 21세)이 시위 도중 신민 당사 4층에서 추락 사망했다. 김경숙이 사망하자 김영삼은 3일간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 휘하였다. 이후 그는 YH무역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백서를 발표하였다.(위키백과)

 ② 결사항전 1979년 10월, 신민당 총재직에 있었으나 뉴욕타임스지를 통해 미국에 대하여 “박정희 정 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다가 1979년 9월 공화당과 유정회는 9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김영삼 총재의 회견기사가 ‘헌정을 부정하고 사대주의 발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김영삼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원조제공을 중단하고 정부에 대해 민주화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하고 사대주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여론에 ‘미국은 우리 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10월 4일에는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주도로 ‘(김영삼이)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 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을 요구했고,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 탈을 의결했다. 제명을 당하게 되자 김영삼은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고 호언장 담하였다. 공화당에서는 그의 이 발언을 외세를 등에 업고 사회분란과 내란을 조장하려는 음모라며 공격을 가하였다.(위키백과)

 4) 부마 경제 : 생략

 5) 변혁에는 반드시 대안 리더, 대안 이념 필요

 (1) 김재규의 1인 혁명(천황 사살)

 (2) 반독재 민주화

 ① 대안 이념 : 민주주의
 ② 대안 리더 : 부마항쟁-김영삼, 광주항쟁-김대중

 (3) 민주혁명

 ① 노무현의 민주혁명 ; 미완
 ② 지금 우리에게 민주혁명의 리더가 있는가?

 3. 정광민 의거, 부산대 시위


  수감 후 출소하는 정광민 씨.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김탁돈) 제공

  1) 시위 불발

  (1) 10월 15일 두 그룹 유인물

  ① 공대 이진걸 팀의 <민주선언문>
  ② 법정대 신재식 팀의 <민주투쟁선언문>

 (2) 유신독재타도 선언 : 유신정권을 ‘조직적 악의 근원’(민주선언문), ‘악의 표본’(민주투쟁 선언문)으로 규정 투쟁, 타도 선언

 (3) 실패 : 시위 주도자 부재

 2) 정광민의 시위 주도(79.10.16)

 (1) 15일 시위 불발, 정광민(경제학과 2), 몇몇 친구에게 시위 주도 의지 표명, 도움 요청

 (2) 자신의 다락방에서 전도걸과 함께 <선언문> 작성, 등사

 (3) 정광민, 10.16일 10시 경 인문사회관 306호, 유인물 나눠주고 주동 시작 이튿날 16일 오전 10시 정광민(상대 2학년)은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40여 명이 공부하고 있던 강의실 뒤쪽에서부터 유인물을 나눠주며 이렇게 외쳤다. “학우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저 유신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합시다!” 분위기는 어제와 딴판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학생들은 의자를 박차고 밖으 로 몰려 나갔다. 전날부터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잠복하고 있던 사복형사들이 덮쳤으나 이내 학생들의 뭇매를 맞고 도망쳤다. 인문사회관 앞에는 순식간에 100여 명이 모였다. 자연스 럽게 “독재타도”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날 학생시위가 그날 저녁에 무려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동아일 보, <허문영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97-부마항쟁>)

 3) 부산대 시위 폭발

 (1) 주동자가 나타나자 폭발적으로 참여

 (2) 교내 시위 후 시내 진출

 (3) 정광민은 친구들 권유로 피신 “아주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는데 대학 2학년이 되어서 정동현 교수가 하는 경제사를 들으면 서 세상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부마항쟁 전에는 운동권하고는 아무 연계가 없었지요.” -81년 가석방되면서는 어떻게 살았어요? “한동안 낭인으로 지내다 84년에 복학을 했어요. 86년에 졸업을 하고 현장활동을 좀 했습 니다. 89년 쯤에 지역사회문제자료연구실이라고 단체를 만들었어요. 나중에는 부산노동자료 연구실이라고 이름을 바꿨는데 노동운동자료집도 내고 노동조합 조사도 하고 교육도 하고 91년까지 <지역과 노동>이라는 무크지를 10호까지 냈는데, 이 책이 제법 유명했습니다. 서 울 대학가에서도 팔리고 부마항쟁 이후로는 이 활동에 모든 것을 바쳤지요."

 -중 략-

 “당시 부산의 운동권 주류가 NL이었기 때문에 NL에 비판적인 저는 왕따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5년 3월에 학위를 - 6 - 받고 들어왔더니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서울 고시촌에서 살면서 하루 하루 차비를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다시 이흥록 변호사를 찾았더니 아는 분을 통해 국정원 산하 연 구소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당시 고영구변호사가 국정원장일 때이고 국정원 산하에 북한경제 를 연구하는 연구소에 민간인 자격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데 정권이 바뀐 다음에는 친노좌파로 낙인이 찍혀서 작년 8월에 쫓겨나듯이 나왔습니다.” (한국일보, [서화숙의 만남] 정광민 “산업화 이후 최초의 시민항쟁… 진상 규명위한 특별법 절실”, 2011-10-16) 부마항쟁 발단된 시위 주동자, 37년만에 누명 벗다 부마항쟁의 발단이 된 1979년 10월 부산대 시위 주동자가 재심을 청구해 무려 37년 만 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부산지법 형사합의 6부(유창훈 부장판사)는 정광민(58)씨가 제기한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혐의 면소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정씨 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22일 밝혔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은 적용법령인 긴급조치 제9호가 당초부터 위헌·무효여서 범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정씨는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 재학중이던 1979년 10월 16일 오전 9시 40분쯤, 인문사 회관에서 미리 제작해둔 ‘언론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헌법철폐와 대통령 하야’ 등의 내용이 담긴 유인물 90매 가량을 뿌리고 집회를 열었다. 이에 부산대 학생 1천여 명이 연대해 함께 집회에 나섰고, 정씨는 학생들과 함께 애국가, 교가 등을 부르며 부산대 정문으로 나가며 행진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결국 정씨는 수사당국에 수배됐고 1979년 10월 19일 경찰에 자수했지만, 시위 주동자라 는 이유로 유치장에서 형사들에게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는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다가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 가 해제돼 석방됐다.  이어 1979년 12월 27일 부산지법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학교로 복귀했지만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예비검속 대상으로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1980년 8월 8일 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부산대에서 출학처분을 받는 등 체포와 고문을 반복해서 받으며 갖은 고통을 당했다. 부마 민주항쟁계승사업회 회장인 정씨는 “국가권력이 불법적 공권력으로 당시 시위에 참 가했던 사람들을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빨갱이로 몰아 구속과 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며 “37년이나 흘러 늦은 감이 많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이런 일들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노컷뉴스, 2016-4-22) ***민주화 훈장을 받아야 할 사람이 차비 걱정 ***독립운동가 신세 저서 :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부산 바보들 : 정광민, 최동원, 노무현



  4. 부마항쟁

 1) 부산항쟁(10.16~18)

 오전 11시, 시위대는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저지하는 경찰까지 뚫고 거리로,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오후 2시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앞 시위는 ‘부산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200∼ 300명씩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남포동과 광복동을 오가며 구호를 외치자 오후 3시경 국제 시장에는 2만∼3만 명이나 되는 군중이 모여 구호를 따라 외쳤다. 시위대에 김밥, 우유, 달 걀, 박카스, 담배가 줄을 이어 건네졌다. 시민들은 시위대가 쫓겨 가게로 들어가면 셔터를 내려 숨겨주었고 건물 위에서 연탄재, 화분, 재떨이, 병 등을 경찰에게 던지며 진압을 방해 했다. 저녁 8시가 넘어서자 시위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윽고 남포동 파출소가 불타고 경찰 순찰차가 불태워졌다. 3만∼5만 인파가 남포동 일대를 가득 메웠다. “밤 10시부터 통 행금지를 실시한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었지만 시위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파출소 11곳이 불태워졌다. 명실상부 4·19와 6·3항쟁 이후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민항 쟁이었다. 다음은 부산민중항쟁 자료집에 있는 부산 시민들의 증언이다. ‘16일 저녁 7∼8시경이 되자 고등학생, 퇴근하던 노동자, 국제시장 주변 주민 등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늘었고 시청 앞은 해방 공간이 됐다. 이날 마지막까지 투쟁한 사람은 서비스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룸펜, 빈민, 노동자들이었고 학생들은 맨 먼저 이탈했다. …다방 아 가씨와 술집의 호스티스까지 나와 박수치고 고함을 질렀다. 세상은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이날 저녁 8시, 부산대는 긴급 교수회의를 열고 무기한 휴교를 결정한다. 다음 날인 10월 17일은 유신이 선포된 지 만 7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날 부산대 학생들에 이어 동아대 학생들까지 시내 곳곳에서 합세했다. 오후 4시경부터 부산 시청 앞 남포동과 광복동에 몰리기 시작한 학생들은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7시 경부터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시위의 주도권은 어제처럼 시민들이었다. 넥타이를 맨 퇴근길 회사원들부터 노동자, 상인, 식당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교생들 까지 나섰다.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졌다.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 7시 25분경 충무파출소를 불태운 시위대는 ‘언론자유’ 구호를 외치면서 밤 9시에는 KBS부산방송국을 공격했으며 세금인상에 반대한다 며 서구청 부산세무서, 서대신 3동사무소 건물을 파괴했다. 시민들은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 기고에는 손대지 않았고 흉기도 지니지 않았다. 민간인의 재산이나 병원 같은 공공시설은 훼손하지 않았으며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다음 은 10월 18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박 대통령은 18일 오전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특별담화문에서 “오로지 악랄한 선동과 폭력 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국리민복을 해치며 헌정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분자들의 일체의 경거망동과 불법행위를 발본색원하자는 데 계엄선포의 목적이 있다”며 “안정과 번영 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사회활동과 생활에는 추호의 불편이나 위축을 주지 않도록 할 것이며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여 국력배양에 계속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궂은비가 내리고 어둠이 깔려 스산했던 18일 저녁 7시 55분쯤 남포동 동명극장 앞에 모여 든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계엄군이 지키는 시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검을 꽂은 M16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대는 공수부대의 진압에 시위대는 흩어졌고 무수한 시민들 이 부상을 당하면서 부산 시내는 다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흘에 걸친 부산 민중항쟁은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 불길은 마산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동아일 보, <허문영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97-부마항쟁>)

 2) 마산항쟁 : 생략

 5. 혁명적 민주주의로 빚은 시민축제

 1) 반독재 범시민 민주항쟁

 (1) 참여계층 : 학생(선도, 끝까지 투쟁), 각계각층 시민

 ① 다수 학생들 끝까지 참여 : 검거자, 재판 회부자의 1/3이 학생
 ② 각계각층 참여 : 특히 민중의 적극 참여, 전투적 공격

 (2) 참여 동기 설문조사(차성환, 부마항쟁과 민중, 172쪽)

 ① 독재정치 반대 35명(68.6%)
 ② 분위기에 휩쓸려서 6명(11.8%)
 ③ 정부 불신 3명(5.9%)
 ④ 진압이 잔혹해서 3명(5.9%)
 ⑤ 먹고 살기 힘들어서 1명(2.0%)

 (3) 부마항쟁 참여에 영향을 준 사건 : 독재, 민중 탄압에 대한 분노가 98%

 ① 김영삼 국회 제명 12명(25.5%)
 ② 대학생들 시위 11명(22.9%)
 ③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 반대 11명
 ④ YH 사건 5명(10.6%)
 ⑤ 경찰의 지나친 진압 4명(8.5%)
 ⑥ 동일방직 사건 1명(2.1%)
 ⑦ 생활고 1명

 2) 혁명성 : 독재정권/권력기관에 대한 선제공격

 (1) 독재기관, 권력기관 공격

 ① 민주공화당사
 ② 경찰서-파출소 21곳
 ③ 서구청, 서대신3동사무소
 ④ 부산세무서

 (2) 언론기관 : KBS(부산), MBC(부산), 부산일보 방화---부산 기독교방송은 예외(부마항쟁 유일하게 보도)

 (3) 폭력의 제한 부산의 야간 항쟁에 대한 관찰 기록을 보면, 데모대가 폭력을 행사했지만 분명한 절제의 선 이 있어 민간인의 점포나 기물을 부수거나 훔친 일은 없었다. 경찰관 납치나 흉기 사용도 없었고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는 손대지 않았다 범죄적인 난동은 없었다. 시위대의 숫자 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수천 명의 경찰이 동원됐고 사흘간의 야간 시위가 벌어졌는데도 사 망자가 1명도 없었다는 것은 데모대의 행동이 포악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기록하 고 있다(조갑제 유고 2, 39쪽)

 3) 시민공동체

 (1) 일체감 시위대와 시민들의 정서적 일체감이 나타난 최초의 형태가 바로 국제시장 안 시위였다. 학 생들이 경찰에 쫓겨 들어오면 수건 등을 내어주고 경찰이 달려들면 셔터 문을 내렸다. 전파 상에서는 애국가를 틀어주고, 음식점∙문구상에서는 음식과 태극기를 내어 주었다. 모두 밖으 로 나와 구경하거나 협력했다. 또 부산시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위대 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면서 ‘동료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성환, 190쪽) 이처럼 시위대와 시민들, 시위대의 구성원 상호간에 매우 강한 일체감을 갖고 있었음이 설 문 조사에서 확인된다. 항쟁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다른 참여자에 대한 일체감을 묻는 문항 에 대한 답변에서 상호일체감은 10점 만점에 평균 7.7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항쟁에 참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부심을 묻는 문항에서도 10점 만점에 평균 8.0의 강한 자부 심을 느끼고 있었다는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차성환, 191쪽)

 (2) 인간 회복 : 통치 대상→항쟁주체, 주권자로

 ① 공포로부터의 해방 : 새로운 주체, 자발적이고 전투적인 군중
 ② 통치∙동원 대상→항쟁주체, 주권자로 10월 16일의 부산 시위에서도 어두워지면서 넥타이를 맨 퇴근길의 회사원, 노동자, 상인, 업소의 종업원, 재수생,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계층을 아우르 는 혼연일체가 이루어졌다. 시청 앞과 충무동 입구 사이의 6차선 대로에 엄청난 인파가 장 엄한 행렬을 이루어 거대한 조수처럼 밀려다니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어둠이 짙 어지면서 시위의 양상은 더 격렬해지고 주간의 소극적 방어위주의 시위에서 적극적 공격위주의 시위형태로 바뀌어 간 것도 확인된다. (차성환, 225)

 4) 혁명적 민주주의

 (1) 사례 1

 ① 부산 남교회 앞 시위대 즉석 토론
 ② 경찰 폭력 맞서 시위대도 폭력을 행사할 것인가?
 ③ 강경론 우세
 ④ 맥주병을 휘두르며 경찰 진압부대 향해 돌격

 (2) 사례 2 : 사진 찍는 동아일보 기자 붙잡아 처리문제 토론

 (3) 사례 3 : 마산 양덕파출소 토론

 ① 무기고를 부수자는 주장
 ② 대부분 군중 반대로 그대로 둠

 (4) 사례 4

 ① 마산도립병원 투석하려는 사람 제지
 ② “병원이 무슨 죄가 있느냐. 병원은 놔두자”

 (5) 사례 5

 ① 마산 시위 현장
 ② 심야 시위를 할 것인가?
 ③ 체포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시위 계속해야 한다는 결론
 ④ 각목 들고 파출소 공격

 (6) 즉석, 직접 민주주의

 ① 즉석 토론을 통해 민주적 문제 해결
 ②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가 살아 움직이는 <주권자 공동체> 체현

 5) 한국민주화운동의 절정

 (1) 민주화의 절정 : 독재/유신의 핵 제거, 유신체제 붕괴로 연결 ; 김재규의 탕탕혁명

 (2) 짧지만 절정의 민주주의, 공동체 체험(10.16~20)

 ① 해방감 : 공포로부터의 해방
 ② ‘나’의 발견 : 통치대상→항쟁주체, 주권자
 ③ 시민공동체-주권자공동체 : 공감과 동지애/동료의식
 ④ 동등한 항쟁주체, 주권자→혁명적 민주주의 체험
 ⑤ 민주항쟁이 시민축제로(조갑제, 유고 1, 308쪽) 열흘(10.16~26) : 소설, 드라마, 연극, 영화 열흘 공부팀


출처 : 최상천의 사람나라 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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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이라는 말은 매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말입니다

 일제강점이라는 말은 매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말입니다. 최고의 매국노 '도쿠주노미야 이태왕'을 주축으로한 왕공족들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었는지를 아주 핵심을 집어서 비판한 영상이 있어서 그 영상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의 글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