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3일 목요일

최상천의 사람나라(3-15) 천사 유시민 1 1980, 21세 천사 탄생

유시민 놈현 재단 이사장! 배신과 변절, 사기의 아이콘! 스네이크 유!

이 사람을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을까?

오늘도 문빠들은 심재철을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배신자로 규정하는 뻔뻔한 날조를 서슴없이 했다.

그러나 그 일은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여서 결정한 것이고 심재철 혼자서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시민 진술서에 이미 나와있다.

왜? 유시민이 그렇게 김대중을 수십년간 갖은 모욕을 주고 저주했는지 그의 진술서에 나와 있다.

유시민은 자기의 천재성을 자랑하기 위해 합수부에서 끌려가서 진술서를 쓸때에 창작을 해서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김대중, 이해찬, 심재철 등 당시 민주화세력들이 다 역이도록 되어있는 내용인데 이 걸을 창작했다(?)고 한다?

말이 돼나?

이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당시 전두환 정권에 21세에 이만한 공훈을 세운 사람은 유시민이 유일하다!

또 형사가 묻지도 않은 행위를 자기가 내용을 더 붙여서 기술하는 것은 도대체 뭔가?

이런 사람이 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에 참석하는 황교안에게 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주접을 떨며 광주 518단체에 놈현교의 교황으로서 행동지침까지 내리는게 이 나라 정치와 민주화 운동권(특히 놈현교)의 현실이다.

https://youtu.be/9TtKDEA6uEE



최상천의 사람나라(3-15)
2019-5-18

천사 유시민 1
1980, 21세 천사 탄생




유시민은 지난 2004년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당시 "20대와 60대의 뇌세포는 전혀 다르다"라며 "60대의 뇌세포는 전혀 다르다"라며 "60대에 가능한 한 책임 있는 자리에 가지 않고 65세부터는 절대 가지 않겠다. 왜냐하면 뇌세포가 너무 많이 죽은 상태에서, 뇌세포가 많을 때 얻은 지위를 가지고 과거의 능력 있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라고 처음 발언했다.(중앙대)

유시민은 자신의 말처럼 60대가 되기 전 2013년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납니다"라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출처 : http://www.d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0048


1.자뻑 유시민

1) 유시민, KBS 대화의 희열
(1) 맞지 않으려고 진술서 상세하게 작성
((1)) 하루 100장 쓰기도
((2)) 분량 늘리기 위해 최대한  창작: 90장
((3)) 내 진술서는 다 아는 쓰레기 정보~허위정보(창작)

(2) 비밀 조직 보호, 학생회 얘기한 진술
(3) 수사국장의 극찬
((1)) 글재주: "야, 글 진짜 잘 쓰잖아"
((2)) 진술서: "이야~ (전모가) 눈에 보이잖아"

(4) 합수부 소득: 내 글재주 알게 되었다

2) 자뻑 유시민: 합수부 진술서까지 자뻑

(1) 천재성+영웅당
토끼(별주부전): 나는 불세출의 창작력(거짓말)으로 합수부 수사관들을 완벽하게 속이고 운동권의 비밀조직을 사수했다.

(2) 천재성 자랑
하루 100장(200자 원고지 150매)도 썼어.
내 진술서는 당시 학생운동 전모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일목요연했거든. 한마디로 <손바닥 진술러>였지!

그래서 수사국장이란 나쁜 놈도 "이야~ 눈에 보이잖아"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거야.

나 정말 대단한 천재 아니야?


2. 1980, 천사 탄생

1) '창작'은 사기->미주알고주알 이실직고
(1) '창작' 전무: 하나라도 지적해 보라!
(2) 알아서 고자질

유시민-초사실주의 다큐 <서울의 봄-서울대편>

~ 전 략 ~

그런데 식의 진행이 늦어지자 수원농대캠퍼스에서 12:30경부터 열릴 예정이던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총학생회장 심재철 및 부회장 김학진은 식이 끝나기 15분 전인 11:55경 수원으로 먼저 출발하였고 저는 끝까지 사회를 보았는데 12:10경 식이 끝나고 나서 제가 학생들에게 “수원으로 갈 사람은 지금 본부앞에 있는 스쿨버스에 탑승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때 웬 복학생 한 명이 와서 모든 학생이 다 수원으로 가기에는 버스 15대로는 부족하니 남은 학생들끼리 시국성토대회를 하게 마이크를 넘겨달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총학생회장도 없고 원례 계획에도 없는 순서이니 나로서는 어쩔수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마이크·스피커 등을 철거시켰읍니다. 그런데 그 복학생이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를 비난했기 때문에 저도 ”뭐 잘못한게 있느냐?“면서 약 5분간 다투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복학생이 바로 학기초부터 ”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사회학과)이었읍니다.

~ 중 략 ~

②회의가 끝난 후 저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함께 원풍아파트의 그의 누님댁으로 가서 성명서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심재철이 “비상계엄 해제” “정부주도 개헌 반대”, “언론자유 보장” 등의 항목을 생각해내어 제 의견을 물었고 제가 거기에 동조하자 그 중 “정부개헌 반대” 문제는 제가 초안하게 하고 “비상계엄해제” 문제는 심재철이 초안하였으며 “언론자유보장”은 심재철이 쓰다가 저에게 넘긴 것을 제가 마무리 하였읍니다. 다음날 아침 그것을 8절지에 베껴 쓴 저는 연대로 가는 길에 14:00시경 교문 앞 복사실에서 20부를 복사하였읍니다.

~ 중 략 ~

1. 4.25경 학생처장실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만나 문제가 되고 있던 병영집체훈련 거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이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학교에서 개별 입소통지서를 발송하지 말 것과 입소기간인 5.4~5.13 열흘동안 1학년에 대해 정상수업을 실시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중 개별입소통지서를 학교측에서는 발송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내었고 정상수업 관계는 확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읍니다.

~ 중 략 ~

②이날 즉 5월 1일 18:00부터 운영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총학생회장 심재철(사대 영어과4)
부회장 김학진(공대 조선공학3)
인문대 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3)
사회대 〃 유승호(경제3)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경영3)
법대 〃 이철우(법3)
사범대 〃 진영효(교육3)
공대 〃 양점식(3년)
약대 〃 김대중(3년)
자연대 〃 배명규(3년)
가정대 〃 김경미(의류3)
미대 〃 박종철
총여학생회장 이재인(교육3)

그리고 저 등이 있을 때 18:00시 조금 넘어 연성만(人文大), 심상환(사회학과), 오세중(철학과) 등 복학생 6명 정도가 들어왔고 이때 심재철은 방문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어서 오쇼”하고 인사를 한걸로 보아 복학생과 심재철 사이에 미리 양해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명목상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를 보았으나 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 사람은 연성만(인문대)이었으며 심상환등 다른 복학생들은 다들 “병영집체훈련을 거부한채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 우리가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론이나 국민들의 인식이 악화되므로 병영집체훈련거부는 깨끗이 철회하고 5월 2일부터는 교내시위를 벌이면서 비상계엄문제를 이슈화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처음에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 사범대 학생회장 진영효 등이 반대의 뜻을 보였으나 결국 설득당해 복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읍니다.

~ 중 략 ~

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여러개의 구호를 단과대학으로 배당하여 주었는데 예를 들어 「비상계엄해제하라」는 사범대, 「노동삼권보장하라」는 경영대, 「정부개헌 중지하라」는 법대 「유신잔당물러가라」는 가정대에... 이런식으로 각 단과대학 별로 구호를 하나씩 나누고 각 과별로 글 내용을 자유롭게 피켓 하나씩을 준비하게 하였읍니다. 이 비용은 모두 학생회비 및 과회비로 충당하였다고 알고 있읍니다.

~ 중 략 ~

④ 이때까지 지휘는 모두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맡았으며 대행진이 끝났을 떄 인원은 6000명 정도였는데 19:00시경 이 6000명의 학생이 다시 교문앞으로 집결하였고 이때부터 약 21:00시까지 「비상계엄해제」 「신현확 퇴진」 「전두환 되진」 「언론자유보장」 등을 주제로한 자유성토가 있은 후 약 21:00경 학생활동위원회(위원장 : 이홍동, 정치4)에서 준비해온 2개의 꼭두각시에 신현확, 전두환의 이름을 써서 교문에 매단 후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화형식을 가졌읍니다.

이 화형식 준비는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군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저는 이 때 사회를 보았읍니다.

~ 중 략 ~

④ 이날 밤 총 연극회 학생 약 10여명은 23:00시경 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 농성학생들이 보는 앞에 궁정동사건을 풍자한 연극을 하였읍니다만 저는 그 학생들의 이름은 알 수 없고 각 써클은 문예부 소관이므로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3)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중 략 ~

1. 5월2일~4일간의 농성기간 중 특히 중요한 것은 5월1일 밤 갑자기 병영집체훈련 응소결정을 내린 학생회가 학생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고 궁지에 몰려있던 5월2일 12:00시부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일만 이천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민주화대총회중 김부겸(복학생, 정치학과4)이 아주 탁월한 웅변력으로 “민주화투쟁을 위해 응소키로 한 총학생회의 결정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함으로써 일만 이천 학생을 멋지게 설득하고 위기에 처한 총학생회를 구출해 주었기 때문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많은 복학생 중에서도 김부겸에 대해서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총회가 끝난 후 “형이 학생회를 살려줬다”라고 심재철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읍니다.

~ 중 략 ~

1. 5월6일 오후2시 4동대형강의실에서 저는 임시총대의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총원 132명중 약 100명이 참석하였고 여기에서는 우선 농성비용등으로 학생회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으므로 1000원씩의 추가회비를 1인당 징수하여 민주화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 가결되었고~

~ 중 략 ~

② 11:00시 경부터 단과대학 학생회장의 지휘아래 단대별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한 인원은 7000명 정도였으며 그중 음대 미대는 낙성대쪽 후문, 공대 법대는 귀가하는 듯이 학교를 나가 봉천동4거리, 신림동4거리에서 12:00경부터 집결시위하도록 되어 있었고 가정대 여학생들은 공대 공사장쪽에서 돌을 주어 날랐읍니다.

~ 중 략 ~

사이 학생들은 서울大. 건대 중앙대. 이대. 성대 동국대 등이 마구섞여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경찰 저지선은 시청-광화문 사이만을 차단하고 있었으므로 시청앞 광장~서울역광장, 을지로 등을 온통 비를 맞으며 “비상계엄해제” “전두환 신현확 퇴진”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 하였읍니다. 이 때 저는 학생들틈에 섞여 있었는데 21:30이 가까와오자 초조해졌고 학생들을 해산시킬 일이 걱정되었읍니다.

또 경찰은 마치 공격할 태세를 취하며 페퍼포그를 뿜기 시작했읍니다. 제가 얼핏보니 경찰저지선에 서서 지휘하시는 분이 평소 서울대 정문에 오시던 분(계급은 총경) 이어서 제가 손을 흔들며 달려가서 인사를 드리고 22:00까지 해산시킬테니까 그동안은 페퍼포그를 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자 응낙해 주셨읍니다.

그래서 22:00경 학생들을 (숫자는 알수 없었음) 시청앞 광장 프라자 호텔쪽에 집결시킨뒤 애국가와 만세삼창을 하고 정확히 22:05에 완전히 해산시킨 일이 있었읍니다.

~ 중 략 ~

② 서울역광장에 집결한 약 4000여명의 서울대生은 이때부터 21:00시 해산 때까지 계속 역광장에서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를 부르며 연좌만 하다가 20:30경 서울大 총학생회장 심 재철이 서울역에 집결한 각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결정한 사항을 발표한다면서 이의가 있드라도 따라 줄 것을 당부한 후 각 학교별로 귀교하거나 해산한다고 발표하였읍니다.

~ 중 략 ~

제가 생각하기에 서울역 광장에는 낮에는 약 5만의 학생 5만의 시민이 모여있어 농성하기에 괜찮지만 밤이 되어 춥고 배고프고 시민들마저 다 귀가해버리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일단 해산시킨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출처: http://thel.mt.co.kr/newsView.html?no=2019050700018245126

2) 박정희 클론 천재

(1) 천재적 기억력

(2) 박정희 클론
((1)) 남로당 군대 총책
((2)) 잡히자 곧바로 남로당 장교 명단 제출(300, 육사 제자)
((3)) 체포(48.11)->육군 차원 구명운동->무기징역(49.1)->군 복귀(49.3 경 문관 복귀, 전시 정보국 문관, 상황실장 역할)

~ 전 략 ~

유시민의 진술서는 전지적 관점에서 관찰자적 시각으로 학우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진술서는 심재철의 공소사실의 핵심 입증 증거로서 활용되었으며 그의 진술서에 내 이름은 모두 78번 언급되었다. 또한 1980년 6월 11일의 유시민 진술로 인해 행적이 소상히 밝혀진 77명 학우 가운데 미체포된 18명은 그의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수배되었다. 그 중 15명은 심재철의 유죄를 입증하는 합수부 진술을 해야만 했다. 유시민의 진술로 故김병곤 선배는 심재철에 관한 합수부 증거이기도 하지만 신군부가 의도한 민청협의 복학생을 통한 재학생 시위 교사의 정황증거가 되어 이해찬 씨에 대한 검찰측 핵심 증거로 판결문에도 인용되었다. 유시민은 당시 운동권 핵심인물이었지만 진술서 제출 이후인 1980.8.20. 아무런 처벌 없이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 후 략 ~


[출처] 국민께 진술서를 공개합니다. - 심재철|작성자 세상만사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sugosu74&logNo=221531845381&parentCategoryNo=&categoryNo=40&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3) 슈퍼리얼리즘 이실적고의 대가

(1) 극찬과 특별대우

((1)) 수사국장의 탄복-극찬: 손바닥 진술서+글솜씨
"야, 글 진짜 잘 쓰잖아" "이야~ (전모가) 눈에 보이잖아"

((2)) 협력자 대우(심재철, 국민께 진술서를 공개합니다)

본인(유시민)의 저서에서 밝히 대로 피조사자에게 수사국 사무실 청소를 시키는 호의를 베푼 것은 어지간한 협조관계가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상도 놈이 그런다”고 처음에는 덤으로 주먹질을 하기도 했지만, 부산 출신 국장은 내 진술의 허점을 설렁설렁 넘겨주었고 나중에는 사무실 청소를 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대선 게임의 법칙> 107쪽, 돌베개 출판사, 1997)”

~ 후 략 ~

출처 : http://road3.kr/?p=16697&cat=161

사무실(보안공간) 청소: 동지적 관계 증명

(2) 불기소: 진술사(6.12) 2개월 후 불기소 석방

4) 21세 천사 탄생
(1) <손바닥 진술서> -> 조서 초본: 배신+사기
(2)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이용->dj 저주
(3) 그 공로로 2달 후 불기소 석방
(4) 유시민-이해찬-운동권: 심재철에게 '변절자', '배신자' 뒤집어씌우기 39년(회군 프레임)

출처 : 최상천의 사람나라 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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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이라는 말은 매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말입니다

 일제강점이라는 말은 매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말입니다. 최고의 매국노 '도쿠주노미야 이태왕'을 주축으로한 왕공족들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었는지를 아주 핵심을 집어서 비판한 영상이 있어서 그 영상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의 글로 옮겼습니다...